
우리는 매일매일은 손에 무기만 안들었을 뿐
살얼음 위를 걷듯 전쟁상황이다.
생존을 다투는 마감기한
동료와 보스의 실랄한 평가
실시간으로 비교되는 성과와 실적
따라가기도 버거운 기술의 진보
사라지는 일자리와 내 주머니 소득
나를 보며 빠끔빠끔 입벌리는 아이들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가장의 무게
어떻게 전쟁상황이 아닐 수 있을까
이렇게 사방에서 조여오는 불안함을 전세의 영웅들은 어떤 마음으로 버텼을까가 나의 주 관심사였다.
그래서 인현이음에서 하는 윤상원 대표님의 난중일기와 명상록 강의를 신청했다.

강의를 들으러 나는 생애 처음으로 을지로 4가에 가보았다.
그런데 정말 잊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내가 서있는 을지로 4가는 마치 다른 나라같은 환각적인 풍경이었다.
이 풍경에 대한 감동을 그대로 머금고 인현이음에 들어서자
환한 하얀색의 강의장이 펼쳐졌다.




그리고 드디어 윤상원 대표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사실 대표님의 강의를 듣기 이전에는
철학에 관심도 없고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철학은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쟁의 기록을 철학으로 풀이한 것이었고,
이 을지로 4가에서 작은 철학서점을 운영하며 사유한 고민들을 나누는 대표님의 발표는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철학적인 삶을 실제로 실천하고 계실까라는 무한한 존경을 자아내며 시작되었다.
피비린내 나고, 적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에서
한 국가의 아니 그 국가에 사는 수많은 백성들의 존망을 두 어깨에 지고 있는
군 지휘관은 어떤 마음으로 이 상황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발표에서는 로마시대 군 지휘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임진왜란의 군 지휘관인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그들이 이 난관을 버티는 방법을 조망해 보았다.
전쟁터에 15년동안 나가 있는 왕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국내의 왕권 찬탈에 대한 압력
그리고 전쟁의 상황에서 수백만명의 목숨을 책임지고, 거대한 하나의 왕국을 존립의 기로에 서게하는
왕관의 무게는 보통의 일반인이라면 제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조건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죽음은 필연적이고, 전쟁은 자연의 이치이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결정하거나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나의 영역이다.
숨바쁘게 돌아가는 치열한 상황에서
내가 정확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과 동떨어져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온전한 나를 만나는 것이다.
감정에 휘몰아쳐지지 않고,
명확한 이성이 상황을 직시하게 될 수 있도록
내가 나의 고요한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이렇게 세상의 번잡함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철저히 개인의 감정을 통제하고 이성적인 판단에 집중하는 태도가
전쟁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통로였다.
이순신은 어땠을까.
난중일기에 그는 무엇을 적어놓았을까
이순신의 글을 보면서 과연 서양과 동양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었다.
이순신은 감정을 그대로 글로 풀었다.
백의종군을 하며 어머니의 부고를 접할 때 느끼는 하늘을 향한 통곡,
명량해전의 승리를 이끈 직후, 왜군으로 부터 죽임을 당한 막내아들의 소식을 접하고서 내뿜는
하늘에 대한 원망.
이순신은 감정을 초연하게 다스리는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지금 순간의 감정을 토해내듯 일기에 거침없이 써내려 갔다.
마치 감정을 다 개워내어 이제 이성만을 전쟁터에 남겨놓듯이
모든 자신의 불안함, 억울함, 사무친 괴로움을 일기에 박아놓았다.
그리고 전쟁터에는 홀연히 차가운 이성만을 들고갔다.


둘은 한 인간이기에 앞서 지휘관이며 나라의 존망을 그들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던 구세주였기에
인간의 감정이 한치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는 전쟁에 끼어들 틈을 없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너무나도 달랐다.
이순신은 솔직했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으며, 다사다난한 세상사에 그대로 부딪혔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세상사가 자신의 판단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세상사를 관조적으로 보며, 하나의 자연의 이치로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놔두었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처한 조건과 상황을 자아와 별개로 인식했지만,
이순신은 군 지휘관으로서, 신하로서,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아로 인식했다.
개인주의 문화가 강한 서양에서는 사회적 관계를 거두어 낸 온전한 개인을 하나의 삶의 주체로 보는 반면에
집단주의 문화가 뿌리내린 동양에서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역할이 살아가는 동안의 의무로서 규정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을 나의 신조로 삼겠다.
사회적 관계속에서 역할로 규정되는 자아는 나에게 사회적 의무감을 던져주기에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기가 어렵다.
우리가 지금 처한 전쟁과 같은 생존게임에서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할로 부여된 압박감을 벗어던지고
진짜 나를 보아야 생존전략을 마련할 수 있다.
나의 관심사, 나의 전략, 나의 재능, 나의 가능성은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나를 규정하지 않았을 때
더 순수하게 볼 수 있고,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관계속에서 스스로를 정의하느라
지금 내가 삶이라는 전쟁터의 지휘관인지, 징집당하여 최전방에 세워진 군인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이제 그 관계를 별개의 상자에 놔두고
나의 본 모습을 직시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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